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위 계승의 법칙 (문단 편집) ==== 분할 상속 ==== 중세 초기 게르만 문화권의 국가나 몽골계 국가인 티무르 왕조와 쇠퇴 이전의 [[오스만 제국]]에서 시행되던 방식. 아들들에게 왕국을 사이 좋게 나눠 분봉시켜주는 것이다. 몽골 제국이 칭기즈 칸 이후 [[원나라]],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등 여러 국가로 나뉘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티무르 왕조의 건국자 [[티무르]]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준다는 몽골인의 관습을 지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가운데 누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인지를 콕 집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티무르 사후 티무르 왕조는 자연스럽게 내가 정통이네 아니네 하는 이유로 내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거기다 티무르가 오래 살아 손자들에게까지 영토를 나누어줬기에 자연스레 헬게이트 오픈. 티무르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샤 루흐의 치세에도 이런 형태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샤 루흐가 문무에 두루 능통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는 한편 군대를 이끌고 왕국 전역을 순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뒤를 이은 아들 울루그 베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소양은 물려받았어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 해 즉위 2년만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왕국 분열~~ 원래 유목민들이었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명확한 권위를 가진 계승권자 없이 황자들이 12세 이후 각지의 영주로 분봉되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새로 즉위한 술탄은 그의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즉, 술탄이 죽으면 그 아들들이 서로 하나뿐인 술탄 자리를 놓고 피를 흘리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처음부터 형제간에 피를 흘렸던 것은 아니다. 2대 술탄[* 엄밀히 말해 술탄은 아니다. 술탄이라는 칭호는 3대 군주 무라드 1세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인 오르한의 동생 알라딘 베이는 오스만 제국의 초대 재상으로서 내정을 훌륭히 이끌었다. 하지만 4대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즉위 직전 동생을 처형하고 그 후 바예지드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해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옥사한 뒤로 그 아들 4형제가 10년에 걸쳐 내전을 벌이면서 형제를 협력 대상이 아닌 라이벌로 보게 되었다. 술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관습이 되었고, [[메흐메트 2세]] 대에 들어 '''아예 형제 처형을 법제화했다.''' 하지만 이 살벌한 경쟁 속에서 성장기의 오스만 제국은 유능한 술탄들을 줄줄이 맞이하는 행운을 가진다. 역대 술탄 가운데 처음으로 형제를 처형하지 않은 인물이 바로 [[쉴레이만 1세]]다. 아버지인 [[셀림 1세]]가 자신과 아들을 제외한 남자 황족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리다시피 해서 쉴레이만에게는 경쟁자가 될 형제가 없었다. 어찌 보면 행운. 하지만 이 제도는 술탄이 아들을 낳지 못 하고 급사하기라도 하면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약점이 있었고, 결국 16대 술탄 [[아흐메트 1세]] 때에 폐지되었다. 이후로는 술탄의 형제는 처형하는 대신 카페라고 불리는 ~~커피숍 아니다~~ 황궁내의 밀실에 가두어두게 된다. 장자상속의 전통이 오래되지 않아, 형제가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무능력자가 술탄이 되어 오스만 제국이 막장으로 치닫는 원인 가운데 하나를 제공했다. 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 때에 이러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창건자인 [[클로비스 1세]]부터가 네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고, 이후 프랑크 왕국은 나라가 갈라졌다 합쳐졌다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한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베르됭 조약이나 메르센 조약은 이 분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